# 책, 미하엘과 한나
나는 그녀와 내 침대에서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집에서 스스로를 불청객으로 느낀 듯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부엌에 또는 열린 날개문 문턱에 서 있을 때,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돌아다닐 때, 아버지의 책들을 문지르며 걸어갈 때, 그리고 나와 함께 앉아 식사를 할 때의 태도에 그런 마음이 묻어 나왔다. p73
나는 그녀의 인사말을 읽고서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다.
"그녀가 글씨를 쓸 줄 안다, 그녀가 글씨를 쓸 줄 안다고!"
나는 그동안 문맹자와 관련된 글들을 구할 수 있는 한 다 구해서 읽었다. 나는 그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겪는, 즉 길이나 주소를 찾을 때 또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고를 때 겪는 당혹스러움에 대해서, 미리 주어진 생활의 틀과 낯익은 행로를 더듬더듬 따라가면서 여기서 벗어나면 어쩌나 하며 느끼는 불안감에 대해서, 글씨를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소모하는 정력에 대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실제 삶에 있어서의 에너지 상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 한나는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첫걸음을, 깨우침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p204
이 책의 주인공은 미하엘과 한나다. 둘은 미하엘이 15살 때, 한나가 36살일 때 만났다. <제1부>에서의 두 사람은 매일 만나 먼저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나면 샤워를 한 뒤 사랑을 나누고, 그다음 나란히 누워 있다가 헤어진다. <제3부>에서의 두 사람은 성년이 된 미하엘이 감옥에 있는 한나에게 책 녹음 카세트테이프를 보내는 것으로 접촉을 한다.
개인적인 소감으로, 이는 마치 미하엘과 한나가 서로에게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첫걸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한나는 미하엘에게 육체적으로, 미하엘은 한나에게 정신적으로 말이다. <제1부>에서 미성년인 미하엘은 한나와의 사랑 행위로 육체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 <제3부>에서 문맹인 한나는 미하엘이 읽어주는 책들로 정신적인 성숙을 할 수 있었다.
# 문맹, 제때를 놓친 인생
그녀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법정에서만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감추기 위해서 늘 싸워왔고 또 싸웠다. 그것은 실제로는 힘찬 후퇴일 수밖에 없는 전진과 실제로는 은폐된 패배일 수밖에 없는 승리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p148
나는 한나의 글씨체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쓰느라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또 얼마나 투쟁을 해야 했을지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여겨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너무 오랫동안 거부했을 경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너무나 오랫동안 거부되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가서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 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p205
미하엘은 '한나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를 문제 삼는다. 한나는 제때를 놓쳐 문맹이 되었고,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갖고 있다. 결국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필적 감정을 거부하고 보고서 작성을 자신이 했다고 시인하며 모든 벌을 자신이 떠맡는다.
그래서 미하엘은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나중에 가서 힘차게 시작한다고 해도...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코미디언 박명수 님의 어록 "늦었다고 생각할 땐 정말 늦었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개인적인 소감으로, 한나의 인생을 통해 '제때를 사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10대는 10대 때를 사는 것, 40대는 40대 때를 사는 것, 60대는 60대 때를 사는 것 말이다. 각 시기를 충실히 살아냄으로써, 각 시기마다의 성숙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나의 시기에 맞게 잘 성숙해 가고 있는 것일까?
# 화석화된 사람,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아니요, 난 지금 명령과 복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형집행인은 누구의 명령에 따라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는 거요. 그는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는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자신한테 방해가 되거나 그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공격하려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것도 아니지요. 그에게는 그들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에겐 그들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p168
나의 그런 태도는 마치 한 달 한 달 죽지 않고 살아남아 강제 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져 가면서 새로 오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무심하게 기록하는 수감자와 같았다. 나는 살인과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느낄 법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든 기록은 이러한 마비 상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마비 상태 속에서 삶의 기능은 최대한도로 축소되고,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자비해지며 가스를 살포하고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범행자들의 간헐적인 언급에서도 가스실과 화덕은 일상적인 주변 환경으로 등장했다. 범행을 저지른 자들의 삶 자체 역시 몇 가지 기능으로 국한되었고, 그들은 마취되거나 술에 취한 듯 무자비와 무관심, 불감증을 보였다. 내가 보기에 피고들은 여전히 이러한 마비 증세에 사로잡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아 보였으며 그러한 상태 속에서 거의 화석화된 것 같았다. p114
한나는 나치 친위대 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했다. <제2부>에서는 한나가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나치 시대와 수용소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강제수용소를 떠올리면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하엘이 슈트루트호프 강제수용소로 가는 길에 얻어 탔던 한 자동차의 운전수를 통해 그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운전수는 살인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격정과 사랑과 증오, 명예와 복수, 부자와 권력, 전쟁과 혁명, 명령과 복종.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도 살인을 할 수 있다. 그냥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하엘은 피고인들을 관찰한 결과 '살인, 죽음에 익숙해져 가면서 마비 상태에 빠지고 무자비, 무관심, 불감증을 보이며 화석화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소감으로, 여태까지 나치 시대와 관련하여 읽었던 책들에서는 피해자 중심의 내용이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은 한나를 통해 가해자 중심의 내용도 다루고 있었다. 마치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 돼지 삼 형제 이야기' 책을 읽는 것 같달까. 작가가 들려주는 가해자의 심리 묘사를 통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 기계화 또는 부품화된 사람, 화석화된 사람’에 대한 위험성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 생각이 머무는 책
“저는 어떤 명제를 제시하거나 증명하기 위해서 또는 특정한 주장이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작품을 쓴 적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이야기를 써 왔을 뿐입니다. 제가 몰두해 왔던 것들, 제 이야기 속으로 스스로 길을 찾아 들어온 것,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런저런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써 왔을 뿐이지요. 한 번도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상징화하기 위해 글을 쓴 적은 없습니다. 제 작품들의 경우에는 거의 전후 문학 이후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는 종전의 전후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이고, 제 작품들이 전후 2세대의 경험에 관해 다루는 이러한 소설의 흐름을 여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전후 문학 작품들은 전쟁을 겪은 세대의 경험, 즉 전쟁 당시의 그리고 전쟁 직후의 경험에 관한 것들이니까요. 제 작품을 포함한 일군의 문학은 전후 세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출처: 유튜브 '2014 박경리문학상 4회 수상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우리는 옛 시대의 항해사처럼 문학과 미술, 음악의 바다를 항해합니다. 문화의 바다는 아주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고향의 익숙한 풍경을 떠나 이 바다에서 미지의 해안과 섬을 만납니다. 해안 뒤의 땅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만난 섬이 외딴섬인지, 군도의 일부인지 알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바다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이고, 우리가 미처 모르는 게 무엇인지 탐색해 보려고요. 우리는 새로운 해안과 섬들을 발견하면서 경이로움을 맛보고자 합니다. 저마다의 문화에는 늘 신비로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신비로움에 대한 동경이 우리를 문화적 모험가로 만듭니다." - 출처: 유튜브 '2014 박경리문학상 4회 수상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책은 나에게 생각이 머무는 책이었다. 마치 꼬마 미하엘이 한나의 집 앞 층계참에서 그녀를 매일 기다리며 머무는 것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생각은 이 책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덕분에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우생학, 인종우월주의에 대해 탐색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하엘은 왜 수영장에서 한나를 아는 척 하지 않았을까?, 한나는 왜 자신이 문맹인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꼈을까?, 한나는 왜 석방을 앞두고 자살을 했을까?'와 같은 궁금증이 들었다. 위에 인용한 작가의 인터뷰 내용처럼 '항해사처럼 문학을 항해'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 주요 발제문
- 미하엘이 한나의 문맹에 대해 비밀을 지킨 것은 잘한 일일까?
- 미하엘은 왜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 미하엘은 왜 한나를 멀리 두고 싶어 했을까?
- 무지도 죄가 될 수 있을까?
# 김훈의 '하얼빈' 책 후기
2024.01.22 - ['책 후기' 인생의 진리를 찾아서/인문학 책] - 김훈의 ‘하얼빈’ 책 후기
''책 후기' 인생의 진리를 찾아서 > 인문학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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