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책 후기
# 책 ‘작별하지 않는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학적 소양이 깊지 않은 나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독서였다. 시공간과 세대를 초월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겹쳐 보였다. 다만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색채가 명확한 느낌이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 책의 표지처럼 색채가 그라데이션한 느낌이었다. 이 말이 이 뜻인가 저 뜻인가, 현실 이야기인가 꿈 이야기인가 확실하지 않은 희미한 느낌으로 읽어나갔다는 말이다.
# 한강 책 읽는 순서
한강 작가는 자신의 책을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 흰, 채식주의자 순으로 읽을 것을 추천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사건을 겪은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 후 2세대에 관한 이야기라 다른 책 보다 ‘그나마’ 읽기가 어렵지 않고 편안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마냥 읽기 쉽고 아주 편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책을 읽는 것부터 어려웠던 터라 많이 부족하겠지만 내 생각을 이곳에 정리해보고자 한다.
# 작별하지 않는다의 의미
동서로 긴 타원의 섬 지도가 화면에 떠올랐다.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p161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는 중의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작별하지 않았다’의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별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이다. 그런데 위 인용문(p161)에 따르면 ‘이유 불문 사살’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레 이유 없는 죽임을 당했고 그래서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수 없었다. 장례식을 하지 못했다. 애도를 할 시간이 없었다. 즉 작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제보다 무섭게 기억할 수도 있으니 제대로 보려는 거였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건 제대로 볼수록 고통스러운 사진이었다. p32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 이상 내 방으로 기어 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 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p314
두 번째로 ‘작별할 수 없다’의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선은 엄마의 사후 트라우마를 보고 견뎌냈다. 인선은 엄마가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재현할 때 함께했다. 엄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제대로 볼수록 인선에게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되었다. 위 인용문(p314)처럼 엄마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선은 잠을 잘 수 없고 계속 죽고 싶었다. 즉 과거로부터, 엄마로부터 작별할 수 없다.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 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p195
세 번째로 ‘작별하지 않아야 한다‘의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위 인용문(p195)과 같이 인선은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에 살고 있다. 인선은 그 장소를 찾아가서 살고, 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이다. 인선처럼 역사를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역사와 작별하지 않아야 한다.
# 눈의 의미
그 후로 엄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이야기는커녕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p87
눈이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p95
위 인용문(p87, p95)과 같이 눈은 기억의 매개체라고 생각했다. 눈만 오면 인선도, 인선의 엄마도 과거의 기억에 닿게 되고 그게 고통으로 이어진다. 우리 누구에게나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매개체가 있지 않을까? 누구는 자신의 몸에 있는 수술 자국을, 누구는 자신의 절단된 손가락을, 누구는 국화를 볼 때마다 ‘자꾸만 생각이 남서’.
파문처럼 환하게 몸 전체로 번지는 온기 속에서 꿈꾸듯 다시 생각한다.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p136
위 인용문(p136)과 같이 눈은 연결의 매개체라고 생각했다. 이 섬의 눈과 먼 곳의 눈, 다섯 살 때의 눈과 서른 살 때의 비, 칠십 년 전 사람들을 덮었던 눈, 황동 펌프에 있는 비가 서로 다시 응결하고 나뉘어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너에게서 나에게로 모두 연결성 있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지극한 사랑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 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311
이 책을 통해 사랑은 ‘상대의 생존을 보살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선이 가출 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인선의 엄마는 딸을 꿈에서 만났고 가장 먼저 해주었던 것은 콩죽을 주어서 딸을 살리고자 하였다. 인선은 친구 경하에게 제주에 가서 아마를 살리고 살펴봐달라고 부탁했다. 아빠는 숨어든 굴 속에서 딸을 살리기 위해 손을 꼭 잡았고, 정심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동생을 살리고자 그 피를 먹이고, 인선의 엄마는 오빠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애쓴다. 이러한 내용들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지극한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 독서 토론 모임 발제문
-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는 어떤 의미일까요?
- 이 소설에서 ‘눈’은 어떤 의미일까요?
- 작가는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길 빈다.‘(p329)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지극한 사랑을 찾으셨나요?
# 독서모임 책 후기: 김훈의 '하얼빈'
2024.01.22 - ['책 후기' 인생의 진리를 찾아서/인문학 책] - 김훈의 ‘하얼빈’ 책 후기